볼프강 바인가르트 Wolfgang Weingart : 포스트모던 시대 타이포그래피 대가
[ 볼프강 바인가르트
Wolfgang Weingart ]
볼프강 바인가르트는 1941년 2월 독일 출생으로 처음부터 전문적인 타이포그래피를 배운 것이 아니라, 독일의 인쇄소에서 식자조판 견습생으로 활판인쇄를 배우며 타이포그래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63년 식자공 도제 과정을 마쳤으며, 그 후 좀 더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자 1964년 스위스 바젤디자인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했다. 1968년부터 바젤 미술 공예학교에 그래픽 디자인 과정의 대학원이 신설되면서 교수가 되어 타이포그래피를 가르쳤는데- 이때부터 모더니즘의 독단적 규범에 도전하는 작업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아인 호프만의 초청을 받아 1974년부터 1996년까지 브리사고에서 열린 예일 여름 프로그램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지도했다.
바인가르트가 교사로 활동했던 시기는 디자인과 인쇄술에 있어 스위스 스타일이 전 세계적으로 사용되고 있던 시기였다. 그의 작품에선 타이포의 정보전달의 목적이 뚜렷하고 절대적인 질서와 타이포의 명료성이 중요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바인가르트는 절대적인 질서와 명료성에 의한 타이포그래피와 고정불변의 지식이나 가치를 강요하는 기존 교육방식에 의문을 갖고 있었다. 훗날 그는 정통적 타이포그래피에서 강조하는 정보 전달을 위한 표현의 제한은 타이포그래피의 본질과 가능성을 무시한 편협한 발상이라고 언급했다.
그의 교육 목표는 고정된 타이포그래피적 표현을 찾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 유연하게 변하는 타이포그래피적 해결책을 찾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기존 디자인 원칙의 완벽한 이해와 이론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모든 새로운 시도는 기초 원리를 통해 발전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교육 목표를 가지고 여러가지 타이포그래피 실험을 했는데- 그 중 알파벳 M 한 글자를 가지고 가독성보다는 실험적이고 창조적인 모습을 갖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한 시도가 유명하다. 덕분에 우리는 가독성 부분에서 자유로워져 표현 중심적이고 해체적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지금 보면 레이아웃 - 스타일 - 크기규격 등을 무시하고 작업하는 것들도 당연시 여겨지고 있지만, 당시에는 혁신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그는 포스트 모더니즘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지며, 뉴 웨이브의 아버지라고도 불리운다.
*뉴 웨이브 : 기존의 전형적인 타이포그래피를 부수고 실험적이고 유희적으로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
1971~1974년에 바인가르트가 스위스 바젤디자인 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수업하면서 모든 학생들에게 조판기술의 기초조형 과정을 학습시키며 양쪽 정렬, 중앙정렬, 비정렬 등과 같은 기초 구성 과정을 훈련시키면서 그로 인해 글줄 길이의 파악과 그것이 다른 단어 및 전체 텍스트, 여백과 어떤 관계를 이루는지 스스로 인지할 수 있게 하여 판형 - 공간 - 비례 - 구성을 자신감있게 다룰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러한 과정 이후 구문구조에 기초한 논리와 텍스트 내용을 시각화하는 훈련을 통해 자신만의 새롭고도 다양하게 정보를 효율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감성표현을 실험했다.
2개 이상의 알파벳 조합을 통해 글자의 성격변화를 만들어냈는데- 먼저 이미지에 사용될 각각 글자의 형태에 대한 특징 분석과 이를 조합함으로써 타이포그래피와 그래픽 디자인의 연결점을 인식시키게 해주었다. 그의 학생들과 함께한 실험에는 주어진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여 나름의 해결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유일한 조건 외에 어떠한 규칙이나 제약없이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하게 했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자 바인가르트는 인쇄시스템이 금속활자 체계에서 사진식자 체계로 혁명이 일어나자 오프셋 인쇄방식과 필름제판 방식을 이용하는 새로운 방향을 추구했다. 과거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에서 보여주던 텍스트와 이미지의 경쟁적 관계에서 기술발달에 의해 유기적 관계가 가능해졌음을 시사한다. 그는 이미지들에 변화를 주기 위해 지금까지의 순수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에서 벗어나 포토그래피와 콜라주, 그리고 하프톤 망점을 이용하여 서로 중첩시키고 병렬시키며 그래픽적인 특성을 극대화했다.
작품 '쿤스크레딧(Kunstkredit)' 전의 포스터(1977)는 바탕을 이루는 필름 한 장을 밑에 깔고 그 위에 여러 장의 필름을 겹쳐 쌓은 다음, 이것을 바로 인쇄용 오프셋 석판으로 전환시켜 제작했다. 또 다른 '쿤스크레딧' 전의 포스터(1979)에서는 자유로운 형태의 외곽선들과 찢어 낸듯한 테두리, 격자무늬의 이미지를 활용해 그리드의 틀을 깨뜨리며 그것이 지녀온 순결성을 의도적으로 침해했다.
그 후의 작품들에서도 그의 사진제판을 활용한 표현주의적 작업은 보는 이의 지각과 감성으로 하여금 그래픽 디자인이 때로는 자율적인 예술 표현의 매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바인가르트의 이러한 혁신적인 교육방법과 실험정신은 결국 1980년대 중반에 탄생한 컴퓨터 기술에도 큰 영향을 미쳤고 이후에 에이프릴 그레이먼 같은 그래픽디자이너 등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바인가르트는 많은 미국 유학생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에이프릴 그레이먼을 비롯해 댄 포리드먼도 포함된다. 또한 미국을 자주 방문하여 강연하기도 했다. 이로써 그의 작업은 미국 그래픽 디자인에 깊은 영향을 미치며, 아메리칸 뉴 웨이브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바인가르트는 타이포그래피를 통하여 다가올 디지털 시대를 예고했다. 그의 디자인 핵심은 타이포그래피에 있었으며 해방감을 느낄만큼 감성적인 표현의 바탕에는 스위스 모더니즘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해석이 뒷받침되어 있었다. 그러나,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로 이 점은 간과된 채 단지 이미지적인 차원만 발췌되어 전해졌다.
이외에도 수년간 유럽 - 남북 아메리카 - 아시아 - 오스트레일리아 - 뉴질랜드에서 강의를 펼친 바인가르트는 여러 미술관과 사설 갤러리에 작품이 영구 소장되는 등 스위스문화사업부에서 수차례 디자인 상을 받았으며, 국제적으로 전시된 그의 출판물과 포스터는 수많은 디자인 관계서적과 잡지에 소개되고 있다. 1978~1999년에 AGI회원이었으며, 1970~1988년에 <TM Typographische Monatsblatter>의 편집위원으로 지내면서 교육 시리즈 <타이포그래픽 프로세스>와 <TM/커뮤니케이션>을 20회 이상 담당했다. 상상력과 통찰력을 독학으로 익힌 디자이너 바인가르트는 학생들에게도 스스로 배우게끔 가르쳤으며 그의 실험적 타이포그래피 작업은 20세기 후반 수십 년의 디자인 흐름에 영향을 미쳤다.
*다음은 <타이포그래피 투데이 - 안그라픽스>에서 발췌한 내용 및 사진입니다.
(1979년 12월 23일 바젤과 뮌헨 사이의 기차 안에서 서투른 영어로 쓰다.)
친애하는 헬무트 슈미트 : 만약 내게 작은 기쁨을,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전야의 하루를 선물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내가 타자한 이 글을 그대로 인쇄해 주시오. 끝내 숙달하지 못한 탓에 철자와 문장이 실수투성이인 별난 영어인 줄 알지만, 오래 전 '나에게 타이포그래피란 무엇인가'에 대해 써 달라고 했지요. 한마디로 답하면, 모든 것이오. 왜 모든 것이냐 하면 내가 납활자 조판을 배웠기 때문이오.
내가 디자인한 것 중에서 타이포그래피 요소를 조금밖에 찾아낼 수 없는 것이라도 내게는 타이포그래피라오. 이 점이 나와 다른 타이포그래퍼의 차이요. 나는 독단적인 인간이 아니라서 경직된 견해 따위는 전혀 없소.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라도 내게는 옳을 수 있다오.
그럼 나의 특별한 타이포그래피 작업 분야를 보여 드리지요. 이것이 그 보기 목록이오.
보시다시피 나는 좋아하는 분야에서 무엇이든 하고 싶소. 이 목록에 내가 좋아할 만한 것을 얼마든지 덧붙여도 좋소. 이런 나의 개방적 자세는 치홀트, 루더, 게스트너(좋을대로 이름을 넣으세요)와 같은 독단적 디자이너들과 다르오.
그들은 모두 대단한 타이포그래퍼이지만 지독한 독단주의자들이오. 나는 늘 1920년대의 타이포그래퍼가 멋지다고 생각하오. 그들은 그저 단순한 타이포그래퍼가 아니라 냉철한 머리와 함께 마음까지 지닌 직인이며 재능있는 발견자들이기 때문이오. 엘 리시츠키, 피트 즈바르트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렇소.
오늘날 내가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타이포그래피 분야에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오. 아마도 뉴욕의 루발린 씨가 엉터리 작품으로 약간의 활기를 일으키고 있소. (내가 보기에 그는 진짜 미국 타이포그래피의 대표자이고 그가 자신의 스타일을 창조한 점은 훌륭하다고 생각하오.) 또는 새로운 타이포그래피 양식을 찾으려 한다는 괘씸한 흉내쟁이 원숭이들은 1970년대 초기의 바젤 바인가르트 스타일을 연상시킨다오. 쿤츠, 본넬 등 많은 미국 디자이너들이 그렇소.
다가올 10년을 위해 무엇인가를 구축할 새로운 영향력이 필요하오. 그것은 어쩌면 원시 민족에게서 올지도 모르오. <아이디어>를 위한 주제, '나에게 타이포그래피란 무엇인가.'에 관해 더는 쓸 말이 없소. 나는 철학을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소. 일하는 것이 좋소.
이야기하거나 쓰기보다는 해내는 쪽이 성격에 맞소. <아이디어>의 타이포그래피 특집이 새로운 관점을 던지는 의미 깊은 것이 되기를 바라오.
1979년 12월 23일 뮌헨에서
볼프강 바인가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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