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각 커뮤니케이션의 거장 : 오틀 아이허

Otl Achier, 1922 - 1991 ]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비주얼 디자인 팀을 이끌며 픽토그램을 개발한 것으로 유명한 오틀 아이허. 그는 나치 운동에 반대하며 히틀러 청년단 가입을 거부한 대가로 1937년 체포되어 결과적으로 대학 시험에 실패하는 등 험난한 청년시절을 보냈다. 1946년 전쟁이 끝난 후, 뮌헤에서 조각을 공부하고 울름에 자신의 스튜디오를 열게 된다.

 

1950년에 아이허는 아내인 잉게 숄(Inge Scholl)과 함께 새로운 형태의 대학 설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는 반 파쇼(fascio) 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자신의 친구들이자 아내의 동생들이며 나치에 처형당한 한스 숄과 소피 숄을 기리는 대학을 설립하고자 했다. 그의 추천으로 스위스 디자이너인 막스 빌(Max Bill)이 동참하게 되었다. 그리고 바우하우스(Bauhaus)를 계승하는 대학 설립에 관심이 많았던 막스 빌의 주장에 따라 1953년 울름조형대학(Ulm Hochschule Fur Gestaltung)으로 문을 열게 된다.

 

정치적인 성격으로 시작된 설립 이념이 디자인으로 대치된 울름조형대학은 바우하우스와 유사한 목표로 그 시대의 디자인 문제를 제시하는 연구와 실습을 중심으로 하였다. 디자인이 일상생활의 스타일 뿐 아니라 학교와 사무실, 공장 그리고 운송수단에도 적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 결과로 울름조형대학은 산업체로부터 많은 연구 개발 프로젝트를 받았다. 그 중에 브라운 사의 하이파이 오디오 컴포넌트 시스템과 아이허가 주관한 루프트한자(Lufthansa) 항공사의 기업 이미지 통합 계획이 포함되어 있다.

 

뮌헨 올림픽 포스터, 1972

아이허는 1972년 뮌헨 올림픽의 수석 디자이너가 되었다. 이때 그는 보다 공식적이고 체계적인 디자인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포스터 디자인과 함께 특히 픽토그램은 국적에 상관없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시각언어로 개발하여 올림픽 정신을 제대로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픽토그램, 1972

각 종목의 선수들의 행동 양식 가운데에서 그 스포츠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가장 특징적인 행동들을 뽑아, 기하학적인 형태로 변형하고 수직-수평-45각도만 사용했다. 이러한 픽토그램은 그 전까지는 접할 수 없었던 독특한 회화방식이자 디자인이었던 것이다.

General Pictogram Design

이후 다양한 픽토그램이 일상생활에까지 사용하게 되어 꼭 필요한 디자인 요소가 되었다(: 

Rotis Typography, 1988

말년에 그는 세리프와 산세리프의 특성을 결합한 로티스(Rotis) 서체를 개발하여 창의적인 활동을 그치지 않았다. 아이허는 젊은 시절 나치에 반대하던 저항정신을 디자인을 통한 사회 참여로 구현하며 자신의 이상을 현실화시킨 디자이너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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