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앙리 드 툴루즈로트렉

Henri de Toulouse-Lautrec ]

 

벨 에포크 시대의 프랑스 파리는 문화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풍요를 누리던 시기였다. 당시, 툴루즈 로트렉은 가까운 거리에서 대도시 밤 문화(무용과 쇼를 감상하며 음주 및 식사를 즐기는 카바레, 뮤직홀, 사창가 등)를 그래픽화한 것으로 잘 알려진 화가다. 유명한 귀족 출신인 틀루즈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유복했으나 어렸을때부터 마음고생이 심했다.

 

선천적으로 뼈가 약하기도 했지만, 14세와 15세에 좌우 허벅지 뼈가 부러지면서 다리의 성장에 장애를 갖게 된 것이다. 결국 약 152cm 키의 단신에 지팡이에 의지해 걸어야 할 정도로 신체적 결함이 있었다. 엎친데 덮친격, 아버지 툴루즈 로트렉 백작은 장애가 있는 자신의 아들에게 눈꼽만큼 애정조차 주지 않았다. 결국 치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로트렉의 삶은 외부활동에 제약을 받게되고- 그는 자연스레 치료과정의 일부였던 그림에 몰두하게 된다. 

 

Portrait of Suzanne Valadon, 1885
Caudieux, 1893
The Photographer Sescau (Le Photographe Sescau), 1894

 

예술 활동 중에서도 특히 포스터로 유명한 그는 외곽선을 사용했는데 실제, 이전에 포스팅한 오브리 비어즐리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At the Moulin Rouge, The Dance, 1890
A Corner of the Moulin de la Galette, 1892
The Englishman at the Moulin Rouge, 1892

 

유화 뿐만 아니라 수채 - 석판 - 파스텔 등에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담아 독특한 스타일을 창시한 그는 고흐와 교류하는 등, 후기 인상주의 예술가들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In The Restaurant La Mie, 1891

 

파리의 카바레, 물랑루즈의 포스터를 제작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도시 하층 계급 여성들을 그림으로써 자신의 신체적 장애와 소외받은 아픔을 달래기도 했다. 

 

그의 삶에 큰 위로가 되어준 것은 그림 뿐만이 아니었다. 독한 폭음과 방탕을 즐겨하던 그는 결국. 건강을 빠르게 해치게 되며 만 36세로 요절하게 되지만- 추후 그가 태어난 남프랑스의 알비(Albi)에서는 툴루즈 로트렉을 기리는 미술관이 창립되었다.

 

짧은 생애동안 무려 약 5천여 점의 작품을 남겼으며- 그 중, 31점은 포스터 작품이다. 이전에는 순수미술에 대한 접근성이 쉬운 편이 아니었지만- 미술작품이 대중에게 소비되고 활용됨에 따라 많은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상업미술과 순수미술의 경계를 허무는 등 현대 미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그는 '현대 포스터의 아버지' 라고도 불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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